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사 관련 정보 (문단 편집) == [[고대]] == [[파일:japan-history-yamato-map.png|width=100%]] [youtube(1tCgVHrboE4)] 일본이 국가로서 틀을 잡은 6~7세기 [[아스카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견수사가 파견되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의 선진 문화를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에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라는 문구를 기입하는 용자 짓을 보여주었다. 보낸 사신은 놀랍게도 살아 돌아왔다. 상대가 수양제였는데도 말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진 일본의 특징인 '''그들만의 세계'''[* 수양제가 고구려를 넘어 섬나라인 일본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상대방에게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문화학자들은 이를 [[일본]]과 [[영국]] 같은 [[섬나라]]가 가지는 공통 특성으로 보기도 하는데 [[로마]], [[프랑스]], [[바이킹]]의 숱한 침입을 겪은 영국에 비해서도 일본이 이 점에서 더 유리했다. 사실 수양제도 일본을 칠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시도했어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원을 다스리는 수양제로선 당최 먹어봐야 뭐 나올 거 같지도 않을 나라였을 뿐 아니라 수나라에서 일본으로 가려면 어떻게 하든 배를 타야 했는데 문제는 수양제는 중국 본토만 먹은 상태였던지라 당연히 당시 기술로 일본까지 배 타고 원정하는 데 아주 오래 걸렸다. 당시에는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해류와 바람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조금 과장을 보태면 약간의 경험과 나머지는 운을 믿고 최대한 잘 떠내려가는 수준에 그쳤던 터라, 육지를 따라 연안을 통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원해를 건너 항해를 한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급품이며 병사며 모든 것을 배로 수송해야 했는데 배가 침몰되기라도 하면 막대한 손해가 발생한다. 게다가 몇 달이나 항해하고 오는 병사들이 과연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단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후 왜는 실제로 중국의 침입을 두려워해 큐슈 지역에 방어 요새를 강화하는 한편 최후의 보루인 신라와도 우호관계를 다졌다. 당은 일본을 공격할 계획도, 능력도 없었으나 이는 결과론적 시각일 뿐, 당시 왜국 조정으로서는 충분히 경계할 사안이었다. 특히 동맹국 백제 역시 황해를 믿다가 당의 해상 침공을 받아 멸망했고 왜 역시 [[백강 전투]]에서 깨진 후라 왜는 당나라를 매우 두려워했다.] 또한 일본이 왜라는 기존 국명을 버리고 '일본'이라는 두 글자의 국명을 채택한 것은 중국에 한 수 깔고 들어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반도 국가들이 전통적으로 두 글자 국명을 채택하고(혹은 고구려의 세 글자. 고구려도 5세기에 두 글자 국명 '고려'로 개칭.) 중국사 왕조들이 한 글자 국명을 채택한 이유는 한 글자 국명의 국가는 천자국이고 두 글자 국명의 국가는 외왕내제건 어쨌든 중원 왕조에 숙이고 들어가는 제후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거란, 여진, 몽골 등이 요, 금, 원이라는 한 글자 국명을 내건 것도 이들이 중원 왕조를 표방했기 때문이라는 점. 따라서 중원 왕조 입장에서도 왜가 두 글자인 일본으로 국명을 고친 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뜻 자체는 조금 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천자국은 한 글자 국명을 쓰고 오량캐들이 여러 글자 국명을 쓴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다. 물론 일본은 중원의 화이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무조건적으로 그렇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이 국서 내용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다. 해당 표현은 단순히 "동쪽에 있는 나라가 서쪽에 있는 나라에게"라는 관용어구적인 표현이지, 일본 중심 세계관을 어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학설. 후한의 승려 용수가 지은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0에는 "불경에 이르길, 해 뜨는 곳은 동방이라 하고, 해가 지는 곳은 서방이라 하고, 해가 이동하는 방향을 남방이라 하고, 해가 가지 않는 곳을 북방이라 한다(如經中說,日出處是東方,日沒處是西方,日行處是南方,日不行處是北方)."라는 구절이 있다. 만주와 한반도에 위치해 있었기에 대륙의 정세를 살피고 중윈의 정권과의 외교 관계에 신경 써야 했던 한민족의 여러 국가와는 달리, 고립된 섬나라인 일본은 그러한 당대의 보편적 트렌드와 상관 없이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려 한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의 세력은 중화 중심의 세계관을 외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실익을 도모하는 위치에 있었던 반면,[* 그러면서도 다들 자기네들 중심의 세계관을 대외적으로가 아닐지라도 안으로는 구축했다. 가령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속국 취급했고 백제는 마한의 소국들을 남만이라 부르며 탐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통일신라 역시 본인들을 '왕성국'이라 여겨 일본을 얕잡아 보기도 했다. 일본의 경우 자기네 섬들에 사는 이민족들을 오랑캐라 불렀고 베트남도 [[후한]]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는 참파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결론은 사람 사는 동네는 다 같다.~~] 일본은 지리 조건으로 인해 중국 문물을 들여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상대적인 한계가 있었던 반면, 직접적인 중화질서의 일원에서는 한 발짝 비켜 서서 [[동아시아]]에서 고립적이고 독자적이며 자주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에는 한결 유리했다. 쇼토쿠 태자 사후 다이카 개신과 삼국시대가 끝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이주를 거치면서 일본은 새로운 정치적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됐는데, 그때 쯤에 [[덴무 덴노]]가 국명을 '일본'으로 바꾸고 천황(天皇)이라는 군주의 칭호를 확립하였고[* 그 전엔 공식적으로는 대왕(大王, 오키미)이었다. 단, 일본서기에서 천황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인 스메라미코토는 대왕호를 쓸 때에도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의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조쿄(현재의 [[나라시|나라]])를 건설함으로써 본격적인 율령제 중앙집권국가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나라 시대까지는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당(통일왕조)|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웠다.[[간무 덴노]]가 다시 헤이안쿄(현재의 [[교토시|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자주적인 국풍 문화를 일으키고 번성함으로써 [[헤이안 시대]]를 이루어냈으나, 점차 외척과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천황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특히 [[후지와라]] 가문의 200년에 걸친 세도 정치가 유명하다.''' 그 시기 [[도다이 사]]를 포함하여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고 [[정토종]], [[선종(불교)|선종]] 수용은 후의 지방 분권화를 촉진하게 됐다. 특히 [[와카]] 등 괄목할만한 문학 작품이 등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